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버트 후버 (문단 편집) === 정치인 생활 === 2년 뒤인 [[1920년]], [[워런 G. 하딩]]의 [[미국 공화당|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자 그 내각에서 상무장관이 되었으며 세인트로렌스 해로를 개척하고 당시 최대 규모 [[댐]] 공사인 볼더 댐 공사를 지정하는 등 행정 분야에서 뛰어난 수완과 능력을 발휘하여[* 정작 후일 [[후버 댐]]이 되는 이 댐의 공사는 1931년에야 시작되었다.] [[캘빈 쿨리지]] 행정부에서도 중용되다가, 마침내 [[1928년]] 대선에서 자타공인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상대 후보로 나선 [[미국 민주당|민주당]]의 [[앨 스미스]]를 [[금주법]] + [[가톨릭]] 내력 등으로[* 앨 스미스는 뉴욕 주지사를 4차례나 재임한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으나, 미국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선후보라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개신교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한 미국에서 가톨릭 교도라는 것은 상당히 불리한 요소라서 2021년 지금까지도 미국 대통령 중 공식적 가톨릭 교도는 [[존 F. 케네디]], [[조 바이든]] 2명뿐이다.] 가뿐히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앨 스미스 입장에선 이때 대통령이 되지 않은 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미 역사상 가장 행복한 낙선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래서 대공황이 터지자 후버를 동정하며, 그가 (하딩 대신) [[1921년]]이나 (루스벨트 대신) [[1937년]]에 취임했으면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동차를!(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덕분인지 큰 압승을 거두었다. ~~천조판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이팝에 고깃국]]~~ 이 선거에서 후버는 [[텍사스]]를 처음으로 차지한 공화당 후보도 되었다.[* 지금 미국 정치 구도를 보면 의아할테지만, 이때만 해도 남부는 민주당 텃밭이었다. 상대 후보인 앨 스미스가 맨하탄에서 태어나 평생 뉴욕에서 자라났는데도 대선에서는 남부 5개 주와 북부 [[매사추세츠]]에서만 승리하였던 것도, 남부 지역이 민주당의 마지막 표밭이었기 때문이다.] [[1929년]] 3월 그가 취임할 때 언론이나 국민들의 기대 역시 대단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는 단순한 경제적 성장만이 아니라 [[우드로 윌슨]] 이래 중단된 개혁정책 역시 성공시켜 보이겠다고 자신했으며, 취임 초기에는 국경분쟁으로 갈등을 빚었던 페루와 칠레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여 두 나라의 국경분쟁을 해결하는 업적도 남겼다.[* 페루와 분쟁을 빚고 있던 페루-칠레 국경 지대의 영토를 페루에게 양보하도록 칠레에게 권유하여 칠레가 점유하던 이 지역을 페루에게 넘겼다.] '''여기까지는 좋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